低山下 2009. 7. 21. 15:58

 

 

 

 

       굴비/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오탁번 씨는 참 대단한 입담을 지니고 있다. 자칫 잘못 들으면 그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버릴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태연하게 엮어낼 수 있는 걸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더구나, 웃음이 절로 나오면서도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그것을 변주(變奏)해 내는 실력이라니!

‘굴비’는 음담패설이다. 시인도, 그래서 제목 옆에 이렇게 설명을 붙여 놓았다. “항간의 음담(淫談). 얼마 전에 이 이야기를 처음 듣고 나는 차마 웃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라고.

 

 음담패설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 그래서 오탁번 씨는 시인이다. 음담에 묻어 있는 삶의 곡진(曲盡)함까지 한눈에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아내의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마음에 목이 메고 마는 사내의 이야기는 해학과 웃음으로 가득 찬 이야기에 전혀 엉뚱한 활기를 불어넣는다. 아내가 굴비를 구해 온 내력을 알고도 굴비를 맛있게 먹고, 그저 퉁명스럽게 볼멘소리를 하는 사내. 그리고 며칠 후 굴비가 다시 밥상에 올랐을 때는 결국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는 사내.

 

 사연이야 어떻든 가난한 살림과 굴비에 얽힌 이야기는 사내와 계집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참으로 진실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야기는 허구이고, 웃고 즐기자고 누군가가 만들어낸 어른들의 우스갯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음담에도 삶의 진실은 있는 것이다. 그런 진실 앞에 어설프게 정조(貞操)나 순결을 들이대며 힐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웃다가 결국은 울고 마는 이야기, 그런 상식을 초월해 버리는 역설은 미당(未堂)의 장기(長技)이기도 하다. ‘질마재 신화’의 “상가수(上歌手)의 노래”에서 미당은 똥오줌 항아리를 거울 삼아 염발질(머리 다듬기)을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상가수의 노랫가락이 하늘의 달과 별까지 잘 비치는 그 똥오줌 거울에서 나오는 건 아닐까, 하고 너스레를 떤다. 결국, 이승을 넘어 저승까지 넘나들었다던 상가수의 노랫가락은 똥오줌 항아리의 더러움을 초월해 그것을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시킨 파격(破格)에서 나온 것이다.

 

 오탁번 씨의 ‘굴비’도 이런 단순한 음담을 훌쩍 뛰어 넘은 파격을 지니고 있다. 사내와 계집의 사랑을 묘사하는 두 구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사내와 계집은/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와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불렀다”에는, 개똥벌레, 베짱이, 소쩍새 등 온 자연과 우주가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내와 계집의 사랑과 함께 호흡하고 장단을 맞추는 미적인 승화의 경지가 숨어 있다. 음담패설에서 우주의 합창을 엮어내는 그런 파격, 그 파격이 이 시의 깊은 매력이다.

 

김춘식〈문학평론가〉

 

 

                   오탁번 시인  

 
출생     1943년 7월 3일 (충청북도 제천)
 
소속     한국시인협회 (회장)
 
가족     배우자 김은자
 
학력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데뷔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수상     1997년 정지용문학상
            1994년 동서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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