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죄무자성종심기
罪無自性從心起에 대해서
어느 날 잘 아는 스님이 찾아와서 자기 도반 중에 선(禪)공부를 정말 잘하는 스님이 있으니 한 번만 만나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를 만나야 하는지 의문이 된다고 하면서 몇 번을 거절 하였지만, 그 스님은 자기의 도반을 뒤집어 줄 사람은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만난 스님들이 자신이 그 동안 공부한 것을 부담 없이 내놓고 탁마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이차적인 문제이고, 실제적인 문제는 어쩌다가 우연히 내 전생을 보게 되었는데 이생에 이 몸을 받은 것도 여러 스님들과 탁마 중에 법으로서 원결을 많이 지었기 때문입니다.
도둑질을 하거나 사람을 죽여 원결을 지은 죄는 참회하고 또 참회 하면 그래도 풀어지지만, 법으로서 맺은 원결은 참회만으로는 절대 풀어지지 않는 대단한 업(業)입니다.
이러한 도리를 잘 아는 나는 사양했지만, 그 스님은 만날 때 마다 <고성염불십종공덕>에 나오는 ‘머리 위에 경전 이고 몇 겁을 산 다 해도, 부처님 제자 되어 삼천세계 돈다 해도, 불법을 전하여서 중생제도 못한다면, 부처님 은혜 갚는 착한 제자 될 수 없네.’ 하면서 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스님이 자기도반을 끔찍이 아끼는 것을 보고 승낙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산 넘고 물 건너 선승이 있는 암자를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직 선(禪) 수행만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선에 대해서 한 가지 물어 봐도 되겠습니까?” 하자,
그는 침묵하며 그저 차만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禪)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을 선이라고 합니까?”
그는 찻잔을 내려놓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습니다.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선이 아닙니까?”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선을 알기 위한 수단이지 선은 아닙니다.”
한 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을 한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을 모르니까 선(禪) 수행을 하지요. 선(禪)을 안다면 선(禪) 수행을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길은 알고 가야지, 알지 못한다면 어느 세월에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는 한 동안 깊이 생각을 하더니, 화제를 돌려 이렇게 물었습니다.
“업(業)이 어떻게 생긴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업(業)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업(業)이 있어 이렇게 태어났으니 알든 모르든 열심히 업(業)을 닦을 뿐입니다.”
“업(業)을 어떻게 닦습니까?”
“그냥, 남들이 하는 것은 다 합니다. 절하고, 기도하고, 염불하고, 경전보고, 참회하고, 화두 참구하고, 천도 등 인연 따라 주어진 것은 무엇이든 합니다.” 라고 하니,
그는 얼굴을 살래살래 흔들며 얼굴을 옆으로 돌리면서
“<죄무자성종심기>라. ‘죄의 본성 본래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난 것, 한 생각 단속하면 죄라는 것이 생기지 않는데......"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숨이 탁 막혀 같이 온 스님을 돌아보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습니다. 그 스님은 눈짓으로 하는 말이 참고 몇 마디만 더 일러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화제를 돌려서 거의 일방적으로 법문 아닌 법문을 한 시간 정도 했습니다. 같이 온 스님의 간절한 눈빛 때문이었습니다. 일방적인 법문 아닌 법문이 다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스님, 지금 저에게 법문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럴 줄 알고 법문 아닌 법문을 했던 것입니다. 상대가 마음을 열면 법문이 되지만 마음을 열지 못하면 그건 법문 아닌 법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비싼 밥 먹고 헛소리 했단 말입니까?”
나는 상황이 그러니 퉁명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그저 상황따라 흘러 갈 뿐입니다.” 라고 말하고 헤어졌습니다.
우리는 다시 산 넘고 물 건너 돌아오는데 함께 가던 스님이 물었습니다.
“저 스님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한 스님인데.....”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다만 아직 참된 스승을 만나지 못해 알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스님이 죄의 근본을 물어오자, 스님이 모른다고 하니 ‘죄무자성종심기’ 라 하면서 ‘죄의 본성 본래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난 것, 한 생각 단속하면 죄라는 것이 생기지 않는데...’ 했을 때 나를 보면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잖습니까? 왜, 그랬습니까?”
“내가 수많은 선승들을 만나 보았잖습니까? 그런데 하나 같이 ‘죄무자성종심기’ 를 붙들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만난 선승들을 보면 하나 같이 화두를 한 생각 단속하기 위해서 들고 있었습니다. 그 한 생각이 일어나면 마음이 일어나 죄가 생겨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죄무자성종심기’, 죄는 그 뿌리가 없으니까. 한 생각 단속하면 죄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 화두가 무슨 지우개입니까? 어떤 스님은 한술 더 떠서 한 생각 이전이 화두라고도 합니다. 도대체 화두가 무엇인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죄는 그 뿌리가 없다고.... 스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그 스님은 물었습니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실 ‘죄무자성종심기’ 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물어왔으니 지금 내 근기로 말하겠습니다.
‘죄무자성종심기’는 부처님의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경지이기에 누진통이 생겼으니 ‘죄무자성종심기’ 일 수밖에요. 법화경을 보면 부처님 지견은 십지보살이라 해도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하물며 부처님 경지에서 말하는 ‘죄무자성종심기’를 범부들이 자기 근기대로 해석해서 각자 편리한대로 쓰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님은 무슨 근거로 ‘죄무자성종심기’ 가 부처님의 경지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님은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시간 속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시간 속에 존재하는 한, ‘죄무자성종심기’ 뜻을 풀어 머리에 담고 다닐 수는 있습니다.
‘죄무자성종심기’ 그 뜻을 머리에 담고 다닌다고 해서 죄가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시간은 인연을 만들고 인연은 업(業)을 만듭니다. 우리들은 시간속에 살면서 좋던 싫던 끝없는 인연들을 만들어 갑니다. 그 인연을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니까요.
물고기가 물속에 살면서 물을 모르는 것 같이, 우리들이 업(業)속에 살면서 그 업(業)을 애써 부정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렇다면, 그 스님에게도 ‘죄무자성종심기’가 이렇다고 말해주지. 왜,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스님은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수행자들은 자신이 참으로 존경하는 스승이 아니고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하기야 그래요. 나부터도 그래요.”
우리는 나무가 놀라서 가지를 흔들릴 만큼 크게 웃었습니다.
나는 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 부처나 조사님들께서 화두를 만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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