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길목에서
베란다의 소사나무 분재에 벌써 잎이 돋기 시작한다.
자연과 우주의 섭리는 변함 없음을 일깨워 준다. 변하는 것을 통해서 변하지 않는 철칙을
어리석고 우매한 우리 인간에게 말 없이 가르쳐 준다.
"굽은 소나무 선산 지킨다" 라는 옛 말처럼 수형 좋고 수령 많은 두 그루는 이미 죽었다.
몇 천원 주고 4~5년 전에 사서 싸구려 플라스틱 화분에 심어 놓은 이 놈만 남아 내게 희망의 봄을 틔우고 있는 것이다.
숙취한 다음날 아침 담배 한 대 피우며 베란다의 화초에 건성으로 시선을 주고 있을 때였다.
자그마한 나무에 쌀알만한 새닢이 연약한 가지 따라 줄줄이 매달려 하루를 여는 내게 섬광처럼
희망의 메세지를 전달한다.
그래, 봄이다. 봄이 온다.
나이와 상관없이 마음을 설레게 하고 역동적인 기운을 느끼는 새 봄이 오는 것이다.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다.
우리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일을 앞당겨 고민하고 걱정한다.
그러가하면 지나간 과거의 좋지 않은 기억을 애써 더듬어 되새김하며
스스로의 귀한 시간을 분노,원망, 후회로 점철한다.
행복하고 감사하며 다행이다 생가가 하는 것도 내 마음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자기가 정의하고 판단하기에 따라, 우리 모두는 각자 엄청나게 행복한 사람이다.
생각해보라. 우선 불구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복이요.
양친부모 밑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것만해도 크나큰 수혜다.
현재에도 죄를 짓고 쫓기는 입장이 아니어서 편안함이요.
며칠째 굶어서 배와 등이 붙을 정도는 더더욱 아니며, 오히려 과다한 영양섭취로 비만과 성인병을 걱정하는 팔자다.
식구 중에 아무도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감방에 가 있지도 않다.
모아 놓은 돈은 없지만 여태까지처럼 앞으로도 굶지 않고 헐벗지 않으며 살 수 있다.
그 정도의 능력은 내게 있고 아무리 힘들어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건강한 정신이 있다.
다만 문제되는 것은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남을 의식하는 마음가짐이다.
좋은 집, 좋은 차, 멋진 옷을 입고 다니는 주위사람들과의 비교심리에서 갈등과 욕심이 생긴다.
알고보면 각자의 삶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다.
나보다 너 나은 사람들은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거리가 나보다 백 배 많다.
권력이나 재물 명예를 가진 자는 틀림없이 많은 고뇌를 한다.
가난하고 알려지지도 않은, 거기에 마음까지 가난한 사람은 걱정할 것이 없다.
오히려 작은 것에서 만족할 줄 알고 작은 호의, 진심어린 말 한마디.
좋은 글귀 몇 개. 훌륭한 음악 한 곡에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풍요와 만족을 느낄 수 있다.
근 삼십여년 만에 중학교 동창생을 만났다.
거의 일어나자 될 시간에 많지는 않은 돈이지만 그가 몰래 화장실 간다면서 계산하였다.
취한 김에 좀 오래 걸린다 싶어 돌아다 봤더니 막 계산을 끝낸 뒤였다.
처음 식당의 자리에 앉았을 때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조금 비싼 것을 시킨 그였다.
그 때부터 자기보다 형편이 훨씬 나은 나를 대신해 자기가 살 것이라는 예감이 있긴 있었다.
굳이 말리지 않았다. 이 나이에 지방의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는 친구다.
하지만 저녁 한끼는 자기가 살 요량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둘이 먹어 10만원도 넘지 않은 돈 때문에 내가 내겠다고 우기지 않았다.
그의 자존심 때문에.. 없어도 절대 꿀리지 않고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당당했다.
마음씀이 실했고 정직하였다. 대화 중에 간간이 각박한 인생을 살다보니 이런 저런 해야 할 노릇을 못했다고
자조섞인 푸념도 하긴 했었지만 속 들여다 보이는 가식과 허풍은 없고 진실과 우정만 간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 고용보험 때문에 올라와서 친구랑 한 잔 하고 있는데 내일 오후에 일 보고
내려간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지금 현재 상황이 결코 여유롭지는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너시간 동안 수 십여년전 풀빵내기 탁구를 쳤던 이야기. 셋이서 꼭 광주공고를 가자고 다짐했던 일
(그러나 나를 제외한 둘은 그 중학교가 학업의 전부였다) 자식들 이야기 등 부담없고 스스럼 없는 서너시간동안
기분좋게 취해갔다.
다시금 저 산야에 파란 풀 돋고, 날이 따뜻해지면 백가지 꽃이 다퉈 필 것이다.
보리모개가 나올쯤이면 종다리는 하늘높이 날아오르고, 장다리 꽃을 희롱하는 봉접의 날갯짓이 현란하리라
봄이 오고 있다. 새 봄에는 가슴 뛰는 봄처녀처럼 내 마음도 가벼워지며 또 울렁거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