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추리
원추리는 여름을 대표하는 우리의 꽃이다. 가장 일찍 피는 애기원추리는 6월에 이미 노란 꽃망울 터뜨려 숲을 장식한다. 이어 큰원추리, 원추리, 노랑원추리가 핀다. 이맘 때면 오대산은 노란 원추리꽃으로 절정을 이룬다.
원추리는 꽃이 아름답고 개화기간이 긴 관계로 동서양에서 오래 전부터 재배해 온 중요한 관상식물이다. 특히 서양에서는 원추리의 관상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지금은 수백 종의 원예품종을 작출해 냈고, 세계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원추리는 동양의 꽃이다.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 등 동북아 원산의 다년초이다. 전국의 볕이 드는 풀밭이나 산지의 양지에서 잘 자란다. 길가, 밭둑, 숲 가장자리나 볕이 새어 드는 나무 아래에서도 잘 견딘다.
봄철 워낙 일찍 새싹이 돋아나기 때문에 중요한 식용식물로 여겨왔다. 지방에 따라 '넘나물'이라 하는데 한자어로 '넓은나물'을 뜻하는 '광채(廣菜)'에서 따온 말인 것 같다.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원츄리' 또는 '업?믈'이라 했다. 수필가 손광성 님은, "원추리는 한자어 '훤초'가 변해서 된 말이다. 원추리를 뜻하는 훤초(萱草)에서 '큁'이 탈락되어 '원초'가 되었고, 원초가 모음조화에 의해 '원추', 여기에 '리'가 붙어 원추리가 되었다고 풀이했다.
원추리는 한자로 훤초(萱草)라 한다. 18세기 때 씌어진 책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는 '원추리' 또는 '업나믈'이라 했고,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萱은 '넘나믈'이라 했다.
원추리는 노란색이다. 노랑은 5방색 중에서도 중앙을 뜻하며 각 방향에서 오는 잡귀를 막아준다. 집안의 중심이며 깊숙한 내당 뜰에 심는 꽃이다.
옛 사람들은 "부녀자가 머리에 원추리꽃을 꽂고 있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했다. 이 말은 원추리 꽃봉오리가 아기의 고추를 닮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의남화(宜男花)라 한 것은 남근 숭배사상에서 유래되었고, 꽃이 지고 나면 전체가 오무라져 붙어버리기 때문에 합환화(合歡花)라 했다.
남의 어머니를 훤당(萱堂)으로 높여 부르는 것은 어머니들이 거쳐하는 뒤뜰에 원추리를 많이 심기 때문이다. 원추리 나물을 많이 먹으면 취해서 의식이 몽롱하게 되고 무엇을 잘 잊어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근심 걱정까지 날려 보내는 꽃이라 하여 망우초(忘憂草)라 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망우초(忘憂草), 의남화(宜男花), 모애초(母愛草)라 한다. 원추리는 노란꽃을 나물로 하는 까닭에 황화채(黃花菜), 화채(花菜)라 한다. 꽃봉오리를 따 말려두고 나물로 했다. 요즈음 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원추리 꽃봉오리 나물은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다. 데쳐서 말린 것이기 때문에 물에 불려 갖가지 요리에 쓸 수 있다.
원추리 잎은 난초나 붓꽃처럼 긴 칼날 모양이다. 봄철에 돋아나는 싹은 밑에서 서로 감싼다. 완전히 자란 잎은 1∼1.5m나 된다. 꽃줄기는 잎과 비슷하지만 잎이 비스듬히 자라거나 중간에서 꺾어지기 때문에 훨씬 길게 보인다. 꽃줄기 끝에서 몇 개의 짧은 가지가 갈라지고 그 끝에서 한 송이씩 노란 꽃이 핀다.
큰원추리나 각시원추리는 가지가 없이 꽃이 한데 뭉쳐서 돋아난다. 원추리 꽃은 위를 향해 비스듬히 핀다. 6장의 꽃잎 중 밖의 3장은 좁고, 안쪽 3장은 넓다. 백합과 식물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밖의 3장은 꽃받침이 변해서 된 것이다. 이러한 생태적 특성은 나리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원추리는 여인과 관계있는 꽃이다. 어머니가 거쳐 하시는 내당 뒷뜰에 심는 꽃이다. 그래서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를 때 훤당(萱堂)이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원추리 꽃은 부귀를 상징한다. 황색은 고귀함과 중앙을 뜻한다. 황색 원추리꽃에서 풍요와 번영을 보았던 때문이다. 또한 긴 꽃봉오리 모양에서 사내 아기를 연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임산부가 원추리 꽃봉오리 말린 것을 갖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또 부인들이 원추리꽃을 머리에 꽂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또한 남아 선호 사상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원추리꽃을 의남화(宜男花)라 불렀다.
원추리꽃은 피었다 질 때면 꽃잎을 오므린다. 꽃봉오리가 긴 원추형이고 활짝 피면 나팔 모양이 되었다가 질 때는 다시 봉오리처럼 오므라 든다.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모양에서 부부의 금슬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합환화(合歡花)라 했던가.
원추리꽃에서는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정유물질이 들어 있다고 한다. 중국의 옛 황실에서는 꽃을 말려 베개 속을 채웠다. 꽃에서 풍기는 향기가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성적 감흥을 일으켜 부부의 금슬을 좋게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원추리를 황금의 베개를 뜻하는 금침화(金枕花)라 했는지 모른다. 침실 뒤뜰에 은밀히 심는 것도 알고 보면 부부의 금슬이 좋아라는 뜻이 담겨 있다.
원추리는 근심을 잊게 하는 풀이라 하여 망우초(忘憂草)라 불렀다. 시경(詩經)에는 전장으로 떠난 님을 그리며 슬픔을 잊기 위해 원추리를 심는다고 했다.
어디서 원추리나 얻어 뒤곁에 심어 볼까.
오시지 않는 님 생각에 마음의 병은 깊어만 가네
焉得萱草 言樹之背
願言思伯 使我心怠
여기서도 원추리는 반드시 뒤꼍(背)에 심는다고 했다. 근심을 잊기 위해 원추리를 심는 마음. 그 것이 바로 옛 여인들이 낭군을 사모하는 마음이었다.
중국의 문호 임어당(林語堂)은 "꽃을 보려거든 원추리(忘憂草)는 심지 말며, 새소리를 들으려면 뻐꾸기는 기르지 말라"고 했다. 원추리는 슬픔의 꽃이고, 뻐꾸기야말로 진달래꽃에 피를 토하는 비극의 새이기 때문이다. 유사(遺史)에 있는 이야기이다.
금원(禁苑)에 겹꽃 복숭아(千葉挑)가 만발했다. 귀비(楊貴妃)와 함께 날마다 꽃나무 아래서 잔치를 벌이던 명황(明皇)이 복숭아 꽃을 기리키며 "원추리꽃(萱草)만 근심을 잊게 하는 줄 알았더니 이 꽃 또한 한을 풀어주는구나."라고 했다.
망우초의 유래에 대해 「이화연수서(李華延壽書)」에는 "원추리꽃을 먹으면 정신이 아득해져 마치 취한 것처럼 돼 근심을 잊어버린다"고 했다. 실제 원추리 뿌리에는 사포닌과 알칼로이드 성분이 포함돼 있어서 마취 효과가 있다. 한방에서는 뿌리를 결핵, 주독, 강정, 이뇨, 해열제로 쓴다.
민간요법으로 전초를 루머티스, 신경통, 위염, 황달에 달여 마신다고 했다. 또 뿌리를 요통, 산후 자궁 수축제로 쓴다. 뿌리즙을 묽게 하여 젖멍울, 중이염, 알레르기에 마시고, 벌레에게 물려 가려운데 뿌리를 짖찧어 붙였다.
대부분의 산채는 봄철에 돋아나는 어린 싹을 먹는다. 원추리는 싹뿐만 아니라 꽃도 먹는다. 꽃을 나물로 하는 몇 안되는 식용식물 중 하나이다. 예로부터 사찰에서는 원추리 나물을 선식으로 즐겨 먹었다. 봄에는 어린 싹을 먹고 여름이면 꽃봉오리로 찜, 졸임, 무침, 전을 하거나 말린 꽃을 찻잔에 띄워 운치를 즐겼다.
옛 선비들도 마찬가지이다. 원추리꽃이 피는 여름이면 꽃봉오리로 화채(花菜)요리를 해 놓고 친한 벗을 불렀다. 향기로운 술과 맛깔스런 원추리꽃 나물을 안주로 하여 흥을 돋우었고, 시구를 주고 받았다.
맛과 함께 멋을 취할 줄 알았던 옛 선비정신이 깃든 원추리가 지금은 장독대와 함께 사라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뜨거운 햇살에 익어가는 장맛과 함께 한 떨기 원추리 꽃이 핀 시골의 정취가 아쉬운 때이다.
원추리꽃이 보고 싶으면 오대산을 찾을 일이다.
참죽나무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이렇게 썼다.
나의 외숙 안공(安公)은 부처(夫妻)가 모두 나이 70세였다. 그의 아들이 부모의 방을 수춘당(壽椿堂)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 집 동자에게 네가 글(壽椿堂記)을 지을 수 있는가 물었다. 그 자리에서 붓을 잡고 쓰기를 "참죽나무는 나무 중에서 오래 사는 것, 부모가 참죽나무처럼 장수하기를 효자와 어진 사람이 기원하네(椿者樹之樹者也 父母之壽如椿之壽者 孝子仁人之所欲也)"라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이 글에서 보듯 참죽나무는 부모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줄기가 구부러지지 않고 언제나 꼿꼿이 선 나무의 자태에서 건장한 젊음을 본 것 같다.
산삼
함경도 지방에서 생산되는 산삼은 중국이나 왜국 간의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값진 것이다 보니 조선 시대 때는 관리들의 횡포도 심했던 것 같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 공전육조장(工典六條章)에서 고을 아전들이 세금이란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산삼이며 담비 모피를 착취하는 행위를 개탄했다. 정다산은 "담비 모피(貂皮)와 산삼(蔘)은 우리 나라의 귀중한 산물이다.「남북사(南北史)」「한서(漢書)」를 비롯한 여러 책에서 낙랑, 현토, 고구려, 발해의 산물을 말할 때는 모두 담비 털가죽과 산삼을 첫번째로 꼽았다"
또 "고을의 수령된 자는 그 지역의 특산물을 탐해서는 안된다. 가령 강계의 산삼이나 초피, 순창의 종이, 경주의 수정, 해주의 먹, 남포의 벼루 등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이삿짐 속에 한 개라도 들어 있어서는 안된다."
지역 특산물이라 하여 갖고 돌아가 자랑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갖고 싶어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함경도 강계에서 집산되는 질좋은 산삼은 진귀한 명물이었다. 중국이나 왜국 간의 중요 무역 품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