低山下 2011. 2. 8. 09:48

 

 

 

 

백만 적군을 앞에 두고 悠悠히 對局

 

 

문인재상(文人宰相) 사안(謝安)이 그러했다. 때는 중국의 동진(東晋) 효무제(孝武帝372-396) 시대. 사안이 시골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고 있다가 정계에 불려 올려지게 된 것이 40을 넘어서고서였다. 당시 호북호남(西府)을 중심으로 한 군벌 환온(桓溫)은 동진 제일의 실력자였다. 환온도 교양을 갖춘 청담가(淸談家)였으나, 실력이 팽배하자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위찬탈(帝位簒奪)의 야망을 품어 착착 공작을 하고 있었다. 사안은 문인 학자로 고명한 왕탄지(王坦之)와 더불어 그 야망의 부당함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환온에게 이들이 눈윗가시였을 것임 두말할 나위없다. 어느 날 크게 연회를 베풀어 백관을 초치하고, 군사를 매복시켜 환온과 왕탄지를 살해하려고 했다. 일벌백계로 반대파를 제압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왕탄지는 겁먹어 떠는 기색이었으나 환온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할 뿐만 아니라 시를 짓기까지했다. 환온은 그 도도한 배포에 그만 기가 질려 무장을 풀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얘기를 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대의 웃기는 야담이라고 믿으려 않겠지만 '세설신화(世說新話)'라고 하는 옛 문헌에 쓰여 있는 일화다.

 

 

 사안의 바둑 일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먼저 시대적 배경과 상황을 살펴 보아야 할 것 같다. 널리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삼국지연의의 오장원(五丈原) 결전은 삼국지의 백미다. 위(魏)의 장수는 사마중달(司馬仲達=司馬懿), 촉(蜀)의 장수는 제갈량이다. 사마중달은 제갈량의 작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성을 굳게 지키며 나가 싸우려 하지 않았다. 제갈량이 부인네의 머리 장식과 복장을 선물로 보내며 사내 대장부냐고 모욕했으나 끝내 움직이지 않고 장기전을 폈다. 이 와중에 재갈량이 병들어 죽었다. 정보를 입수하자 일거에 쳐들어갔는데 웬 일인가 멀리 산 능선에서 제갈량이 직접 지휘를 하고 있지 않은가. 사마중달은 퇴각을 명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것은 목각 인형이었다. 사마중달이 죽은 제갈량에게 패했다는 고사가 인구에 회자된 것이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사마중달 즉 사마의(司馬懿)는 그후 동북방면 공략에 대공을 세워 그 위력으로 위나라의 정권을 장악하고 아울러 민심을 수습함으로써 세력기반을 넓혔다. 그리하여 그의 손자 사마염(司馬炎=武帝))이 魏를 딛고 晋을 건국하였는데, 내부의 분란과 대외적인 五胡의 압박이 겹쳐 晋(西晋)은 통일된지 36년만에 남흉노(南匈奴)에게 멸망하였다. 따라서 화북에는 5호16국이 난립하고 한민족은 강남으로 대거 이동하게 되는데, 거기서 晋의 황족으로 양자강 유역을 지키고 있던 사마예(司馬睿)를 옹립하여 황제를 삼으니 이가 東晋(317-420)이다.

 

 

 

 

 

 사안의 고사는 중국 전사(戰史)에 특필되는 東晋의 비수(淝수)의 전쟁(383년) 때이다. 5호16국의 영주 前秦 제3대의 왕 부견(符堅)은 이미 화북을 제압한 세를 몰아 스스로 병력 60만,기병 27만을 몰고 일거에 동진의 수도 남경을 엄습하려 하고 있었다. 동진정부는 사안을 대도독, 사안의 동생 사석(謝石)을 총대장, 사안의 형의 알들 사현(謝玄)을 선봉장으로 입명하여 급거 방어의 전선을 형성했다.

백만의 적군이 회비(淮淝=淝水의 인근) 가까이 와서 진을 쳤다는 소식에 수도 南京은 패닉상태가 되었다.

 

 사안의 이야기는 이로부터 시작된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선봉장인 사현이 대도독 사안의 본진에 가서 작전지시를 물었다. 그러나 사안은 기다려라는 말 한 마디 뿐 아무런 지시가 없었다. 답답하고 초조한 나머지 사현이 재차 가서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는 일, 사안의 막역한 친구 장현을 시켜 알아오게 했다. 이윽고 사안이 출진 준비를 명하고 진두에 나아가니 이미 일족 친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도 물론 전쟁터에서다.

사안은 조카인 사현과 별장을 걸고 바둑을 두고 있었다. 평소라면 사안이 사현에게 두 세 점 접히는 바둑이었다. 그런데 이 날은 급박한 부견의 대군을 앞에 두고 마음의 안정을 차리지 못 했던가 호선으로도 바둑이 되지 않았다. 사안은 옆에서 관전하던 또 다른 조카를 돌아보며 “네 별장을 제공할 용의가 없는가”라고 했다. 사안의 별장은 밑천이 다 들어났으니 네가 뒤를 대면 어떻겠느냐고 약을 올린 것이다. 별장을 건 것은 장난이었겠지만 당시는 실제로 별장을 걸고 내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자, 그렇게 조카들과 노닥거리며 시간을 끌던 사안은 본진으로 돌아가자 장수들을 소집하여 각기 소정의 임무를 지시했다.

 

세 번째 스토리는 비수의 격전이 천지를 진동하는 무대다.

史書에 따르면, 부견의 대군이 미처 집결하여 대오를 정돈하기도 전에 동진군이 대거 비수를 건너 선제공격에 나섰다. 불의의 기습에 부견군의 선봉이 속절없이 패퇴하자 후속부대는 대혼란에 빠졌다. 그리하여 백만의 대군은 보기 좋게 무너지고 말았다. 부견은 유시(流矢)를 맞고 몇몇 친위대의 호위로 사지를 탈출하기는 했으나 후일 부하의 손에 살해되었고 마침내는 이 참패가 前秦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

최전선인 사현으로부터 대승전보가 즉각 사안에게 도착했다. 그 때에도 사안은 기적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보고서를 읽자마자 책상에 던져 둔 채 무표정하게 바둑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객이 내용을 물으니 태연하게,

“젊은 애들이 적을 격파한 모양이야”라고 한 마디 할 뿐이었다.

그러나 어금니가 으스러진 사실은 나중에야 발견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천하를 가르는 대 전란의 와중에 평소와 같이 대국에 임하고 평소와 같은 착점을 할 수 있었던 이 고매하고 침착한 명재상의 존재 그 자체가 공황상태에 빠진 수도를 진정시키고 백배의 용기를 불러 일으켜 비수의 승리를 거둔 것은 그야말로 특필하고도 남는 일이라 하겠다.

 

 

 

 

 

 이쯤에서 앞으로 돌아가 사안과 함께 죽임을 당할 번 했던 왕탄지의 얘기를 마두리해야 할 것 같다. 바둑인들은 바둑을 坐隱이라고도 한다. 조용히 은거하여 천하를 관망한다는 뜻이다. 철학적인 이 말을 만들어낸 이가 바로 사안의 친구인 왕탄지이다. 이와 더불어 手談이라는 예쁘고 해학적인 말을 만들어낸 이가 같은 시대 사람인 지둔(支遁=道林)인데 흔히 지공(支公)이라고 했다. 노장의 학에 정통하고 반야학설(般若學說)로 이름 높은 스님 사회의 청담의 수장이었다. 바둑인들에게 이 두 사람은 坐隱,手談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원천으로서 길이 기억할 것이다.

 

사안의 주변에는 지둔 왕탄지 왕희지(王羲之) 등 일류명사 문인 예술가가 있어 풍아한 사교의 세계를 형성했다. 너무도 유명한 ‘난정의 아회(蘭亭雅會 352년)’는 말하자면 그 대 단원이었다. 난정의 아회란 東晋의 목제년간(穆帝年間) 당시의 명사 41인이 모여서 곡수(曲水)에 잔을 띄워 계연(禊宴)을 베풀며 시를 지어 읊은 모임을 말하는데 훗날 당태종이 그 원본을 구해 천금을 걸었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진, 왕희지가 쓴 글씨의 시첩이다. 난정은 절강성 소흥현 서남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