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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 작가 김성동

低山下 2011. 8. 9. 14:04

오마이뉴스 홍성식 기자]

▲ 김성동의 '비사난야(절 아닌 절)' 입구 석물(좌)과 백운당에서 바라본 초가을 풍광.
ⓒ2004 홍성식
가을 맞으러 다산(茶山)묘소와 팔당호를 넘다

집권당의 당의장(이미 전임이 됐지만) 신기남의 아버지와 제1야당 대표인 박근혜의 부친(박정희의 친일행각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었지만)이 공히 '친일협력자'였다는 사실이 한국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8월 하순. '청산되지 못한 역사' 속에서 슬프게 살고 있는 30대 젊은이 둘이 강원도 홍천을 향해 양평의 다산묘소와 남양주 팔당호를 넘었다.

홍천은 병자호란 때 순국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과 1910년 8월 29일 치욕적인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맞고는 스스로 곡기를 끊어 자결한 김창규(金昌圭)의 후손이자 <만다라>와 <풍적>의 작가인 소설가 김성동의 산 속 집이 있는 곳.

최근에 <천자문-하늘의 섭리 땅의 도리>(청년사)를 출간하며 담담한 어조로 자기 선조에 관해 밝힌 김성동. 그가 책에서 들려준 "제 아무리 빼어난 도둑도 정신과 피는 훔치지 못 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다른 몸이니 늘상 그 몸가짐을 삼가야 한다"는 말은 기자의 아버지가 들려주는 조상에 대한 이야기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렇다. 대(代)를 이어 면면히 흐르는 혈통의 유전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아스팔트를 무르게 푹푹 삶아대던 여름도 이제 닫히고 있다. 누가 뭐래도 곧 가을. 소슬한 바람과 만산홍엽(滿山紅葉)을 기다리다 못해 경기도 양평과 강원도 홍천 사이에 있는 정각(正覺) 김성동의 산 속 집으로 가을을 찾아 나섰다.

바로 그날의 우연찮은 여행에서 기자는 <만다라>와 <길>을 통해 한국문학 최고의 유장한 문장과 미려한 문체를 보여준 김성동의 '문학혼'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를 깨달았다. 반갑고도 고마운 일이었다.

병자호란, 의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지른 김상용

▲ 선조의 글씨에 관해 설명하는 김성동. 은근한 자부심이 비친다.
ⓒ2004 홍성식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택, 호는 선원을 쓰던 김상용이란 어른이 있었다. 그는 김성동의 할아버지가 늘상 자랑스러워하던 안동 김씨 가문의 사람. 1590년 병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병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했고 후에는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정승(우의정)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그의 시와 글씨는 당대 제1인자의 것으로 손색이 없었다 한다.

그가 일흔 살이 훌쩍 넘어 맞게 된 병자호란. 원로대신인 김상용은 왕세자의 아내와 장남을 보필하여 강화로 피난한다. 그러나, 강화수비를 명받은 김경징이란 자는 "여기까지 오랑캐가 올 일이 없다"는 것을 핑계 삼아 매일 같이 주지육림에 빠져든다. 그러나, 웬걸. 밀어닥친 오랑캐는 양민의 아낙들을 능욕하고, 백성을 도륙한다. 살아보겠다고 자신의 식솔들만을 부랴부랴 건사하여 도망친 수비대장 김경징.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김상용은 화약이 보관된 망루에 올라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해 세 번 절하고는, 평소에는 피우지 않던 담배를 물어 불을 붙이고는, 13살 손자만을 무릎에 앉힌 채 부리던 하인을 모두 피신시키고 화약에 불을 붙여 스스로 폭사(爆死)한다.

<삼국지>의 일흔 노장(老將) 황충처럼 창을 들 물리적 힘이 없었던 노학자. 자결은 임금과 백성 그리고, 이 땅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선비가 택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는 죽음으로 정절과 기개를 지킨 것이다.

한일합방, 스스로의 방에 못질을 하고 굶어죽은 김창규

세월이 흘러 1880년 안동 김씨 가문에서 창규라는 아이가 태어난다. 여섯 살이 채 못 되어 논어와 맹자, 중용과 대학, 시경, 서경, 역경까지 읽었던 영민한 소년. 14살이던 1894년 갑오개혁이 있던 해 조선왕조에서 시행한 마지막 과거에서 진사로 급제한, 하여 왕으로부터 '백색교지'를 받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 중 하나.

그로부터 16년 후인 1910년 굴욕적 한일합방 소식을 접한 그는 "오얏나무의 꽃 떨어졌으니 이제 이곳은 내가 머물 땅이 아니다"라고 일갈한 후 북향삼배 하고, 그간 보던 책과 써온 글을 모조리 태우고는 스스로 방문에 못질을 해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는다. 우국지사 매천 황현(1855~1910)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 의기.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0세. 지금의 기자보다 네 살이 어린,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이었다.

아버지도 아내도 서늘하고 뜨거운 김창규의 단심을 두려워해 감히 방문의 못을 빼고, 억지로 미음을 떠 먹이지 못했다. 그는 소설가 김성동의 증조부.

이제 김창규는 그가 여섯 살이던 시절(1886년) 쓴 글 몇 점으로만 남았다. 그 글은 김성동의 고조부가 자랑스런 여섯 살 천재아들의 재주를 귀하게 여겨 다락에 고이 보관하던 것들. 자신의 글과 책을 태우던 그날 김창규의 눈에 띄었다면 남지 못했을 글씨들이다.

▲ 김창규가 여섯 살 때 썼다는 글씨들.
ⓒ2004 홍성식
아버지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썼을 듯한 石龜(석구·돌거북)와 연습용으로 쓴 '春(춘)' '亭(정)'의 힘있고 호방한 필체. 이게 어찌 여섯 살 꼬마의 글씨인가? 김창규의 죽음 이후 아버지는 아들의 글 옆에 깨알같은 세필로 "(나라를 위한 것이니) 아까운 내 자식의 죽음이 어찌 슬프다고만 할 것인가"라는 발문을 남겼다하니 이야말로 충절의 부전자전이 아닌가.

<오적>과 <황톳길>의 작가인 김지하(시인)에게 난(蘭) 치는 법을 가르친 고 무위당 장일순도 이 글씨를 보고는 김성동에게 "많은 걸 배웠다"며 흡족하게 웃었다고 한다. 여섯 살 아이의 아이답지 않은 필체 그리고, 그 필체보다 드높았던 지조와 절개.

이들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그 문장 어찌 향기 높지 않을까

이제 과거로부터 2004년으로 돌아와 소설가 김성동의 문장을 본다. "이로써 한국에 더 이상의 구도소설은 없다"라는 평가를 받은 역작 <만다라>. 한 줄 한 줄이 마치 시와 같이 미려하고, 한 단락 한 단락이 유장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 현대문학의 최고봉.

그가 <길>과 미완성작 <풍적(風笛)>에서 보여준 탁월한 역사의식과 일가를 이룬 철학은 더 말해 무엇하리. 또한 그 미려와 유장 그리고, 역사의식과 철학이 그의 선조들로부터 유래했음을 부연해 무엇하리.

바로 그 김성동이 "먼길 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뭘 하나 주고싶다"며 먹을 갈아 정좌했다. 일순 그의 거실 '백운당(白雲堂)'이 모종의 에너지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 셋이서 소주와 맥주를 열 서너 병 마실 동안 김성동은 붓을 들지 않았다. 이윽고 자정 무렵의 일필휘지.

▲ 김성동이 장 시간의 머뭇거림 끝에 쓴 글씨. 화중연화.
ⓒ2004 홍성식
'火中蓮華(화중연화)'다. "불 속 같이 견뎌내기 힘든 사바탁세지만, 더러움 속에서도 순결한 봉우리를 여는 연꽃처럼 장엄한 길에 이르시게"라는 뜻을 직접 듣고는 가슴이 뜨겁게 서늘해졌다. 그를 만나 교류한 4년 동안 내심 품고 있던 질문, "충절의 기개는 어떻게 문장으로 전이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는 순간이었다.

오마이뉴스/홍성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