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원예화훼

영산홍 담양 계당

低山下 2013. 5. 28. 17:01
계당의 영산홍
무등산 시가문화권은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선생을 대시인으로 길러낸 곳이며 정치적으로 힘들때마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던 정서적 고향이다.
그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내 고향 지실마을이 지금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언제 어떻게 그 꿈이 현실될지는 알 수 없지만, 자연환경국민신탁에서는 "송강마을, 송강문학의 고향"으로 가닥을 잡아가며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
400여년동안 송강의 추억과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던 "계당溪堂"과 송강이 즐겨찾던 "송강의 고향 산책길 만수명산로萬壽名山路"가 그 동안 간직하고만 있던 '송강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가려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300년이 넘었다고 전하는 계당의 영산홍映山紅도 그 화려한 꿈을 미리 그리듯 화사한 빛깔로 옛 터를 밝히고 있다.
송강문학의 산실
조선 500년은 오직 중국을 섬기며, 한문漢文만을 참글로 숭상하던 그런 시대였다. 세종대왕이 오늘의 한글인 훈민정음훈민정음을 만들어 반포했지만, 당시의 선비들은 정작 언문諺文이나 개글로 여기며 아랫사람들이나 아녀자들이 쓰는 문자쯤으로 비하卑下하고 있었다.
그런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 개글이라던 우리글을 사용하여 인구人口에 회자되는 아름다운 가사작품을 꽃피운 시인이 바로 송강 정철선생이었다.
송강은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 관동별곡關東別曲 등을 창작하여 후세 사람들로부터 '조선시대의 참 문장은 오직 이 세편뿐이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송강의 관동별곡은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竹林에 누었더니'로 시작한다. 옛 창평현昌平縣, 무등산 가사문화권의 담양이 바로 송강이 머물던 죽림이다.
송강은 비록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정작 그를 길러낸 것은 무등산의 자양이었다. 16살 소년 송강을 만나 비범한 인물됨을 발견하고 환벽당에 머물게하여 가르치고 후원했던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선생을 비롯,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 1519-1582) 등은 스승이었으며, 서하당 김성원(金成遠 1525-1597)과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1533-1592) 등은 평생의 벗이었다.
송강은 1561년(명종16년)에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이듬해 27세에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한양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대쪽같은 성품으로 타협을 몰랐던 송강은 동서당쟁의 정쟁을 피하지 못하고 파란만장한 정치생애를 살았다. 송강은 모함을 받을 때마다 벼슬을 버리고 발길을 돌려 자신을 길러준 무등산자락의 죽림을 찾아 아픈 몸을 누이고 상처를 치유받는 가운데,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무등산가사문화권은 송강문학의 산실이며 고향이 되었다.
지실에는 송강의 첫 스승이며 가장 큰 후원자였던 사촌 김윤제선생의 환벽당環碧堂(광주광역시지방기념물 1호)을 비롯 양산보의 소쇄원瀟灑園(국가명승 40호)과 송강의 벗이며 처외재당숙이된 김성원의 서하당棲霞堂이 있고, 김성원이 그의 스승이며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하여 지은 식영정息影亭(국가명승 57호)이 있다.
식영정은 석천 임억령과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과 송강 정철 등이 자주 시회를 열던 곳으로 일명 사선정四仙亭이라고 불렸다. 송강의 성산별곡星山別曲은 식영정 20영을 배경으로 이곳의 사시풍경의 아름다움을 담아 읊은 작품이다.
계당과 만수명산로
최근인 2000년 11월에 지실에는 한국가사문학관이 새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까지 12대를 지켜오던 "계당溪堂과 만수동계곡萬壽洞溪谷"일대를 자연환경국민신탁에 기증하여 영구보존토록 하였다.
자연환경국민신탁에 맡겨진 계당과 만수동은 마을 깊숙히 감춰진 또 하나의 비경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만수동 명산의 길에 추풍병객이 왔네萬壽名山路 秋風病客來'하며 낙향한 송강자신을 '추풍병객秋風病客'이라고 고백하던 그런 다정한 고향의 산책길이다.
이런 인연은 송강의 4남 기암 정홍명(畸庵 鄭弘溟 1582-1650)으로 이어졌다. 기암은 1616년에 낙향하자 송강이 다니던 만수동 이웃집터에 새로 집을 짓고 "계당"이라고 편액했다. 그러던중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했다는 조보가 날아들었다. 기암은 그해 한양으로 올라가 벼슬길에 나가 후에 대제학까지 올랐지만, 일찍 낙향하여 아버지 송강의 작품들을 수습하며 생을 마칠때까지 계당에서 살았다.
기암조차 떠난 후 동복현감을 지냈던 기암의 아들 정이(鄭涖)가 살았고, 잠시 소쇄처사의 후손인 양경지(梁敬之)가 살기도 했는데, 송강의 현손 정흡(守環 鄭)이 조카인 소은 정민하(簫隱 鄭敏河)를 양자로 하면서 소은의 장손들로 지금까지 이어져 영일정씨소은종가迎日鄭氏簫隱宗家 계당溪堂으로 불리고 있다.
계당과 계당사람들은 사촌과 석천의 후손들을 이어 환벽당과 식영정을 지키는 주역으로 활동했으며, 계당은 이곳을 찾는 선비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전쟁은 야만이다
의병들의 활동으로 임짐왜란에는 호남을 공략하지 못했던 왜군들은 정유재란때 호남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때 소쇄원도 불태워졌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수난을 겪었던 이곳 문화유산들은 동족상잔의 6.25전란중에 다시 온 마을이 방화를 당했고 계당역시 그 화를 피하지는 못했다.
1951년 11월의 일이었다.
지실마을이 수난을 겪은지 반세기를 넘어 60년이 되었지만, 마을도 계당도 복원을 못하고 옛터로만 남아있다. 그러나 마을 곳곳에는 고색이 창연한 돌담과 고목나무들이 서 있고, 계당 옛터와 만수동에는 계당사람들이 경영하는 '햇살부르는 바람소리'가 2000년 8월에 문을 열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른 봄, 호남 5매라고 알려진 계당매溪堂梅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여 4월말이면 수령 300년이 넘은 영산홍과 자산홍이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한 여름에는 백일홍이 만발하여 이곳 만수동이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살았다는 기산영수箕山潁水'임을 일깨워준다.
지난 2009년 한해에만 5만명이 넘는 손님들이 우리 '바람소리'를 찾았다.

'나무와 원예화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박주가리 [Metaplexis japonica]  (0) 2014.02.17
백 년 만에 피는 꽃  (0) 2013.05.28
황칠나무  (0) 2013.03.15
붓꽃을 좋아하시나요  (0) 2012.07.24
참죽나무와 가죽나무  (0) 2012.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