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孝子) 한천당(寒泉堂) 이공(李公) 실적비명(實蹟碑銘) 병서(幷序)
영광(靈光)의 묘량(畝良)은 선원(璿源)1)의 유서(由緖) 깊은 가문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대대로 살아온 터전으로, 고(故) 효자(孝子) 선무랑(宣務郞)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2) 한천당(寒泉堂) 이공(李公), 휘(諱)는 홍종(洪鍾), 자(字)는 계명(季鳴)이신 어른의 자취가 서린 곳이다.
내가 일찍이 그 동리(洞里)를 지나갔는데, 뽕나무․가래나무 우거진 마을3)에 한집안 일가(一家)들이 담장을 이어 거주하며, 집집마다 밭 갈고 독서하며 풍속(風俗)이 예의(禮儀)를 숭상하니, 그 빛나는 모습에 한천당께서 남기신 풍격(風格)이 스며있었다. 이에 나는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부러워하며, 머리 숙이고 생각에 잠겨 서성이노라 차마 그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씨 가문의 자손들이 선대(先代)의 빛나는 자취가 오래되면 혹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마을 입구에 비석(碑石)을 세워 길이 전하기를 꾀하였다. 그리하여 공의 후예 제신(濟信), 현복(鉉福), 남신(南信), 현섭(鉉燮) 등이 일가인 문복(文復)과 경섭(敬燮) 두 분 사문(斯文)이 지은 행록(行錄)을 가지고 멀리 덕룡산방(德龍山房)에 있는 나를 찾아와 간절히 비문(碑文)을 청하였다. 고사(固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행록(行錄)을 참고하여 다음에 서술하는 바이다.
공은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양도공(襄度公) 휘(諱) 천우(天祐)4)의 후손으로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 쌍매헌(雙梅軒) 휘(諱) 학(鶴)5) 의 아드님이다.
가정(嘉靖) 무술년(1538) 8월 9일에 나시니 타고난 자질(資質)이 순수(純粹)하고 어려서부터 하늘에 뿌리를 둔 착한 품성을 지녀 어버이를 섬기는 극진한 효성(孝誠)이 향리(鄕里)에 널리 일컬어졌다. 외숙(外叔)인 윤(尹) 귤정(橘亭)6)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니, 널리 고금(古今)에 통(通)하여 시무(時務)에도 훤하였으나 영달(榮達)에 뜻이 없어 벼슬길에 나가기를 바라지 아니하였다.
어머님 상(喪)을 당하여 장례(葬禮) 모시기에 예도(禮度)를 다했으며, 뒤에 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자 여묘(廬墓)하고 소식(素食) 행하기를 삼년상(三年喪)을 마칠 때까지 하였다.7)
일찍이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할 때8) 붕당(朋黨)의 조짐이 점차 심해지는 것을 보고 소매를 떨치고 돌아왔는데,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9)가 일어나자 사람들이 그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곡식을 모으고 창고(倉庫)를 기울여 바닷길로 의주(義州)에 수송하였다. 수은(睡隱) 강항(姜沆)10), 선양정(善養亭) 정희맹(丁希孟)11) 등 여러분들과 더불어 수성대장(守城大將) 사매당(四梅堂)12)을 도와 방략(方略)을 내니, 이에 성(城)이 보전되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본도(本道) 순무사(巡撫使) 한준겸(韓浚謙)13)이 공이 지략(智略)이 있음을 알고, 군자(軍資) 조달의 큰 임무를 위임하니 공이 몸을 던져 일을 수행하였다.
기해년(1599)에 장계(狀啓)가 조정에 보고되어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어 계공랑(啓功郞)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에 제수되었으나 또 나가지 않았다. 정미년(1607)에 또 선무랑 황산도찰방에 제수되어 마지못해 부임(赴任)하였으나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고요히 은둔해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그 시대 유창문(柳昌文), 강항(姜沆), 신응순(辛應純)14)과 같은 훌륭한 분들이 시문(詩文)으로 공의 뛰어난 행실(行實)과 높은 풍모(風貌)를 찬미한 것이 쌓여서 권축(卷軸)을 이루었으니 여기에서 가히 공(公)이 높이 기려지는 까닭을 알 수 있겠도다. 만력(萬曆) 임자년(1612) 7월 1일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은 75세이다.
배위(配位) 금성 나씨(錦城羅氏)는 현감(縣監) 척(惕)의 따님으로 송재(松齋) 세찬世纘)의 손녀이다.15) 가정(嘉靖) 을사년(1545) 3월 6일에 나셔서 만력 정유년(1597) 10월 6일에 돌아가셨다. 아드님 극승(克承)16)은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추증(追贈)되었다. 그 후 후손이 번성하여 여러 고을에 퍼지고 대대로 가문(家門)의 명예가 창대(昌大)하니, 공께서 끼치신 덕행(德行)의 보답이 여기에 드러나는 바이로다.17)
아아. 공은 순수(純粹)하고 매우 뛰어난 바탕으로 시(詩)와 예(禮)를 익히어 효행(孝行)은 종신토록 애모(哀慕)를 품었고, 재주는 경세(經世)의 방략(方略)을 지녔으며, 천인(天人)18)의 학문과 음양(陰陽)의 이치, 왕도(王道)19)와 패도(覇道)20)를 두루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만약 고기와 물의 만남처럼, 조정(朝廷)에서 군신간(君臣間)에 만나 정무(政務)를 토론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그 포부(抱負)와 경륜(經綸)이 세상에 큰 혜택을 드리웠을 터인데, 빛을 머금고 높이 누워 세상을 마치니 식자(識者)들이 공을 위해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나 그 뛰어난 행실과 높은 풍모가 역사책에 실려 있고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려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리니, 시대를 만남과 만나지 못함이 공에게 있어서 무엇을 더하고 덜할 것이 있겠는가. 마침내 이에 명(銘)한다.
천인(天人)의 빼어난 학문 [天人之學]
문무(文武)를 겸전한 재주[文武之才]
종신토록 부모를 애모(哀慕)하였으니[終身哀慕]
훌륭하도다, 그 효성이여![猗歟孝哉]
나라 형편 위급(危急)함에[國有緩急21)]
의(義)를 떨쳐 깃발 세웠고[奮義立幢]
나가고 들어섬엔 의(義)를 따랐으며[出處22)有義]
몸소 실천할 땐 오직 삼가셨도다.[踐履惟謹]
사무치는 그리움 부쳐[羹牆23)寓慕]
곧은 옥돌 넉 자에다[貞珉24)四尺]
백세(百世)의 높은 풍모(風貌) 기리나니[百世高風]
지나는 이들, 반드시 경의(敬意)를 표하리라.[過者必式]
1972년 12월 일
진주(晉州) 정철환(鄭喆煥) 삼가 짓고
종후생(宗後生) 학용(學庸) 삼가 쓰다
부기(附記) : 공은 묘장(畝長) 영당사(影堂祠), 장성(長城)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 영광(靈光) 수성사(守城祠)에 배향되셨다. 이 비(碑)는 종(從) 16대손 창헌(昌憲)이 국역(國譯)하여 2009년 월 일 한천당(寒泉堂) 종중에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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