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 |
은자(隱者)의 이름은 하계(夏届) 또는 하체(下逮)이며, 성씨는 창괴(蒼槐)이다. 대대로 용백국(龍伯國)의 백성으로 살았다. 본래는 복성(覆姓)이 아니었는데 은자에 이르러서 우리나라의 음이 느리기 때문에 그 이름과 함께 바뀐 것이다.
은자는 아이 적에 이미 하늘의 이치를 아는 듯하였으며, 학문을 하게 되어서는 한 방면에 얽매이지 않고 그 요지를 얻기만 하면 거기에서 중지하여 끝까지 마친 것이 없었으니, 이는 넓게만 공부하고 깊게 탐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장성해서는 개연히 공명(功名)에 뜻을 두었으나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았다. 이는 그의 성격이 남의 비위를 잘 맞추지 못하는 데다 또 술을 좋아하여 몇 잔만 마시면 남의 장단점을 들먹이기 좋아하며, 귀로 들은 말을 입속에 묻어 둘 줄 몰랐으므로 사람들로부터 아낌과 존중을 받지 못하여 관직에 등용이 되었다가도 곧바로 배척을 받아 쫓겨나곤 했던 것이다. 비록 친구들이 애석히 여겨 그의 성격을 고쳐주려고 권유해보기도 하고 책망해보기도 하였지만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중년에는 자못 후회를 하였으나 사람들은 이미 그를 얽매어 둘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여 다시 등용하지 않았고, 은자 역시도 더 이상 이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전에 왕래했던 사람들은 모두 선한 사람들이었는데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여러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으려 해도 실로 어려운 일이다.”
하였으니, 이러한 점은 그의 단점이자 장점이 되기도 하였다.만년에는 사자갑사(獅子岬寺)의 중에게 토지를 빌려 경작을 하였는데, 농원(農園)을 만들어 이를 취족원(取足園)이라 이름 붙이고 자신의 호를 예산농은(猊山農隱)이라 불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좌우명을 지었다.
은자가 평소 승려를 좋아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그의 소작인 신세가 되었으므로 평소에 품은 뜻이 어긋난 것을 드러내어 자신을 희롱한 것이다.
[주D-001]용백국(龍伯國) : 전설상의 거인국(巨人國) 이름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의하면, 발해(渤海)의 동쪽에 대여(岱輿)ㆍ원교(圓嶠)ㆍ방호(方壺)ㆍ영주(瀛洲)ㆍ봉래(蓬萊)의 다섯 선산(仙山)이 있었는데, 용백국의 거인이 와서 이 산들을 떠받치고 있던 자라 가운데 여섯 마리를 낚시로 낚아 가버리자 대여와 원교 두 산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주D-002]본래는 …… 것이다 :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은 최해가 자신의 일생을 서술한 자서전(自敍傳)에 해당되며 《고려사》 최해열전(崔瀣列傳)에도 그 전문(全文)이 수록되어 있다. 역자의 막연한 추측이기는 하지만 최해의 이름인 ‘해(瀣)’ 자는 하계(夏届)를 반절(反切)로 합친 음인 ‘혜’, 하체(下逮)의 합친 음인 ‘헤’와 비슷하며, 성씨 ‘최(崔)’ 자는 창괴(蒼槐)의 합친 음인 ‘최’와 일치한다. 또한 본관(本貫)은 다르지만 같은 최씨인 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의 또 다른 호가 창괴자(蒼槐子)인 점도 이와 연관이 있을 듯하다.
[주D-003]사자갑사(獅子岬寺) : 최해가 만년에 은거한 사자산(獅子山)에 있는 절이다. 국역 대본에는 ‘師子岬寺’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 최해열전에는 ‘師’ 자가 ‘獅’ 자로 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동사강목(東史綱目)》 등 다른 문헌에도 ‘獅’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獅’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예산농은(猊山農隱) : 예산(猊山)의 예(猊) 자는 사자(獅子)와 같은 뜻이다. 자신의 농원인 취족원이 사자산(獅子山) 자락에 있었으므로 ‘예산에서 농사지으며 은거한다’는 뜻의 ‘예산농은’으로 자신의 호를 지은 것이다. 이로 인해 후대에는 최해의 호를 졸옹(拙翁)과 함께 예산(猊山) 또는 농은(農隱)으로 불렀으며, 그의 문집(文集) 또한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권8에는 《농은집(農隱集)》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자신의 호를 짓는 방식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야은(壄隱) 전녹생(田祿生 : 1318 ~ 1375), 목은(牧隱) 이색(李穡 : 1328 ~ 1396),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 1337 ~ 1392),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 1347 ~ 1392), 야은(冶隱) 길재(吉再 : 1353 ~ 1419)로 이어진다.
[주D-005]삼보(三寶) : 불교에서 존경해 받드는 세 가지, 즉 깨달음을 얻은 부처〔佛〕, 이를 기록한 불교의 경전〔法〕, 불법을 배우고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승려〔僧〕를 이른다.
[주D-002]본래는 …… 것이다 :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은 최해가 자신의 일생을 서술한 자서전(自敍傳)에 해당되며 《고려사》 최해열전(崔瀣列傳)에도 그 전문(全文)이 수록되어 있다. 역자의 막연한 추측이기는 하지만 최해의 이름인 ‘해(瀣)’ 자는 하계(夏届)를 반절(反切)로 합친 음인 ‘혜’, 하체(下逮)의 합친 음인 ‘헤’와 비슷하며, 성씨 ‘최(崔)’ 자는 창괴(蒼槐)의 합친 음인 ‘최’와 일치한다. 또한 본관(本貫)은 다르지만 같은 최씨인 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의 또 다른 호가 창괴자(蒼槐子)인 점도 이와 연관이 있을 듯하다.
[주D-003]사자갑사(獅子岬寺) : 최해가 만년에 은거한 사자산(獅子山)에 있는 절이다. 국역 대본에는 ‘師子岬寺’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 최해열전에는 ‘師’ 자가 ‘獅’ 자로 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동사강목(東史綱目)》 등 다른 문헌에도 ‘獅’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獅’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예산농은(猊山農隱) : 예산(猊山)의 예(猊) 자는 사자(獅子)와 같은 뜻이다. 자신의 농원인 취족원이 사자산(獅子山) 자락에 있었으므로 ‘예산에서 농사지으며 은거한다’는 뜻의 ‘예산농은’으로 자신의 호를 지은 것이다. 이로 인해 후대에는 최해의 호를 졸옹(拙翁)과 함께 예산(猊山) 또는 농은(農隱)으로 불렀으며, 그의 문집(文集) 또한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권8에는 《농은집(農隱集)》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자신의 호를 짓는 방식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야은(壄隱) 전녹생(田祿生 : 1318 ~ 1375), 목은(牧隱) 이색(李穡 : 1328 ~ 1396),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 1337 ~ 1392),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 1347 ~ 1392), 야은(冶隱) 길재(吉再 : 1353 ~ 1419)로 이어진다.
[주D-005]삼보(三寶) : 불교에서 존경해 받드는 세 가지, 즉 깨달음을 얻은 부처〔佛〕, 이를 기록한 불교의 경전〔法〕, 불법을 배우고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승려〔僧〕를 이른다.
-한국고전문헌 '졸고천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