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시

흰 바람벽이 있어

低山下 2010. 12. 6. 16:23

 

   흰 바람벽이 있어

 

                                 백  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
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
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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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벽 : 집안의 안벽
때글은 : 오래도록 땀과 때에 절은
쉬이고 : 잠시 머무르게 하고, 쉬게하고
앞대 : 평안도를 벗어난 남쪽지방, 멀리 해변가
개포 :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이즈막하야 :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르지 않은, 이슥한 시간이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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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어려움에 대해 체념하고 긍정하는 순간 운명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생겨난다. 이 시를 읽으면 가난과 외로움, 쓸쓸함 그리고 슬픔들이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변한다. 주어진 운명을 능동적으로 인식하는 위대한 힘…. 백석 시가 우리에게 주는 비장한 아름다움이다.

이 시가 발표된 1941년 연희 전문학교 졸업반에 재학 중이었던 윤동주는 이 시 ‘흰바람벽이 있어’가 주는 운명애(運命愛,Amorfati)에 매료되어 고독한 시인의 길을 꿋꿋이 걸어갔다. 윤동주가 남긴 대표작 ‘별헤는 밤’에는 백석이 사랑했던 ‘프랑시스 잼’ 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인용되어있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흰바람벽이 있어 . 1941년 4월 <문장>(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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